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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photographable 정희승展 / CHUNGHEESEUNG / 鄭喜丞 / photography
날짜 : 2011-02-17 (목) 16:57 조회 : 2797


정희승_Untitled #11 the series The Reading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135×180cm_2010

Unphotographable

정희승展 / CHUNGHEESEUNG / 鄭喜丞 / photography
 
2011_0303 ▶ 2011_0327 / 월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11_0303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8:00pm / 주말,공휴일_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두산갤러리
 
DOOSAN GALLERY
 
서울 종로구 연지동 270번지 두산아트센터 1층
 
Tel. +82.2.708.5050
 
www.doosangallery.com


Still-Picture/Life : 정희승의 근작들 ● 사진은 '순간(刹那, moment)'을 포착한다. 그런 의미에서 사진은 어빙 펜의 첫 번째 사진집 이름처럼 '보존된 순간 Moments Preserved'이다. 그런데 '보존된 순간'이라 할 때 '순간'은 대체 무엇인가? 발터 벤야민의 서술대로라면 초창기 사진에서는 모든 것이 지속성을 갖고 있었다. 당시 사진판은 감광작용이 약했던 탓에 옥외에서 오랫동안 햇빛에 노출시켜야 했고 그 때문에 초창기 사진에는 광선의 집산, 명암연속성이 유지됐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초창기 사진에서 포착된 순간은 '지속성을 간직한' 순간이다. 초기 사진에는 벤야민식으로 말하면 순간성과 반복성, 일회성과 지속성이 서로 긴밀하게 얽혀 있었다. 하지만 이후 기술적 진보와 더불어 노출시간은 점차 짧아졌고 머지않아 반복성, 지속성을 배제한 순간, 즉 말 그대로의 즉물적 순간을 포착한/보존한 사진이 대세가 됐다. ● 스틸 사진(still picture)은 이렇게 즉물적 순간을 포착한 사진에 적합한 이름이다. 즉물적 순간을 담은 사진에서 '순간'은 '짧은 순간'이라기보다는 '정지된(still) 순간'일 것이기 때문이다. 정지된 순간을 포착한 사진에서 사진가가 포착한 텅 빈 풍경은 여백의 美를 운운할 수 있는 정취를 간직한 풍경이 아니라 공허한 풍경이다. 으젠느 앗제의 텅빈 풍경에 관한 벤야민의 언급을 인용하면 그것은 '쓸쓸한' 것이 아니라 '아무런 정취도 없는 것'이다. ● 이렇게 '아무런 정취도 없는 것'에 몰두하는 사진작가들은 마치 외과의사처럼 냉담하게 거리를 두고 자신의 대상을 마주 대할 것이다. 그에게 가령 누군가의 얼굴은 어떤 표정과 기분을 간직한 얼굴이라기보다는 그저 얼굴-즉물적 얼굴이다. 가령 토마스 루프의 「초상」 작업에 등장하는 얼굴이 그렇다. 또 그에게 도시 풍경은 도시인들의 삶의 애환과 욕망을 아우르는 풍경이 아니라 그저 풍경이다. 그 즉물적 풍경은 토마스 스트루트의 도시 풍경이다. 이렇게 우리 시대 사진가들은 냉담하고 건조하게, 인간적 개입을 배제하고 그저 순간, 단지 풍경, 얼굴 그 자체를 포착한다. 이것이 우리 시대 사진(예술)의 대세다. 누구 말처럼 이것을 중성 미학, 무표정 미학(deadpan esthetics)이라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정희승의 사진 작업도 우리 시대 사진(예술)의 전체 흐름 속에 있다. 이 작가의 사진 작업 역시 루프와 스트루트처럼 냉담하고 건조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냉담하고 건조하지만 정희승의 사진 작업은 루프, 스트루트와 다소간 다르다. 여기에는 루프와 스투르트와는 다르게 어떤 표정이 있기 때문이다.

중성 미학, 또는 무표정 미학 계열에 있는 작가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사진에서 다루는 대상이다. 루프에게 그 대상은 '얼굴'이었고 스트루트에게 그것은 '거리(street)'였다. 즉물적으로 포착한 루프의 얼굴 사진은 그 자체로 얼굴의 유형학이 되고 냉담하게 포착한 스투루트의 거리 사진들은 그 자체로 도시의 유형학이 될 것이다. 그러면 정희승 사진 작업의 대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정취'다. 정취란 무엇인가? 그것을 우리는 일단 어떤 감정/표정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정희승은 비극적 정취, 슬픈 감정/표정을 -즉물적으로-사진에 담는다. 냉담하고 건조하게, 그리고 작가의 개입을 최대한 배제하고 말이다. 그것은 그 감정을 촉발한 어떤 사연, 그 정취를 만들어낸 어떤 특별한 상황을 배제하고 그저 그 감정, 단지 그 정취를 잡아내는 일이다. 예컨대 우리는 「Persona」 연작에서 (등장인물의) 슬픈 표정과 만나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그가 왜 슬퍼하는지 알 길이 없다. 작가 역시 그 슬픔을 촉발한 계기나 원인을 제시하는데 관심이 없다. 그렇게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것은 군더더기(?)가 배제된 '슬픔' 자체 혹은 '비극적 정취' 그 자체다. 그런 의미에서 「Persona」 연작은 '비극적 정취'의 유형학이라 부를 수 있다. ● 희극적 정취를 다룬 작업도 있다. 영상 작업 「Folly」가 그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웃음'을 연기하는 한 배우를 만난다. 무표정의 상태에 있던 배우는 카메라 플래시에 반응하다가 점차 웃기 시작한다. 물론 우리는 그가 왜 웃는지 알 길이 없다. 왜 웃는지 알 길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당혹감은 그 웃음이 최고조에 이르러 눈물, 콧물이 뒤범벅되고 그것이 연기인지, 진짜인지 가늠할 수 없는 지경에서 최고조가 된다. 그것은 낯선 웃음, 달리 말해 '순수 웃음(pure laughter)'이라 부를 만한 어떤 것이다. 그것은 즉물적 웃음, 또는 웃음 그 자체다. 또 하나 이 작업이 흥미로운 것은 웃음 내지는 희극적 정취와 더불어 하나의 정취로서 '무표정'이 다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Folly」가 시작할 때 우리는 무표정과 만난다. 그리고 「Folly」가 끝날 때도 우리는 무표정과 만난다. 전자에 비해 후자는 어떤 정취가 덧붙은 무표정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최초의 무표정과 최후의 무표정은 같지만 다르다. 이것을 무표정의 유형화라 부를 수 있을까.


그런데 이렇게 비극적 정취, 희극적 감정, 무표정의 정취를 다룬 작업이 처음부터 안고 있는 난제가 있다. 그것은 작가 자신을 포함해 정희승의 사진 작업 앞에 선 이들이 그것을 슬픔 그 자체, 웃음 그 자체로 마주 대하기 이전에 벌써 이미 사진 속 얼굴과 마주 대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얼굴은 루프의 초상 작업에 등장하는 얼굴과 다르게 표정을 간직한 얼굴이다. 즉 그들이 마주 대한 것은 사실 '순수 웃음' 그 자체라기보다는 '웃고 있는 누군가의 얼굴'이다. 그것을 '웃고 있는 누군가의 얼굴'로 보는 사람은 그 웃음의 유래를 찾아 어떻게든 그것을 '이유가 있는' 웃음으로 설명하고자 할 것이다. 이것은 '순수 웃음'이 초래한 당혹감에 대처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연기하는 배우의 얼굴과 연기되는 배역의 얼굴이 교차되는 양상에 주목하는 것이다. 예컨대 누군가는 그것을 "서로 다른 페르소나가 공존하는"(신보슬) 순간으로 설명할 것이고 또 누군가는 "중간자적 존재, 또는 비결정적 주체"(강수미)를 마주 대하는 순간으로 설명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누군가의 얼굴을 운운하는 것은 (적어도 내가 보기에) 정희승이 추구하는 바와 거리가 있다. 무엇보다 이런 종류의 설명에서 그 자체로서의 정취, 감정, 표정은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나기 때문이다. ● 이러한 상황에 작가는 어떻게 반응할까? 정희승의 또 다른 연작 「Reading」을 예시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업은 배우들이 대본을 반복해서 읽어나가면서 배역을 이해하고 창조해가는 과정을 다뤘다. 배우는 반복적인 대본 읽기 과정에서 자신이 맡은 배역을 점차 이해하고 자기화할 것이다. 그 과정은 배우의 얼굴뿐만 아니라 몸의 동작, 자세 일반에서도 관찰될 수 있다. 정희승은 그 가운데 어느 한 장면을 택해 우리 앞에 제시한다. 따라서 이 작업은 기본적으로 「Persona」, 「Folly」와 궤를 함께 한다. 하지만 「Reading」이 다른 작업과 다른 것은 배우로부터 좀 더 물러나 연기하는 배우의 몸짓을 좀 더 부각시키고 얼굴(표정)의 의의를 좀 더 약화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얼굴보다 정취를 부각시키는 하나의 대안일 수 있을 것이다.